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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중세사

임진왜란의 배경과 전개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치적 배경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사림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사적 배경

조선 초기의 국방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기관을 설치했으나 정상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이는 남왜북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국가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다.

 

일본의 통일

도요토미라는 인물에 의해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왜군의 침공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대군을 나누어 조선을 침공했다. 정명가도(명을 정벌하는데 조선은 길을 열어달라)를 내세웠지만 통일 후 제후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 총병력은 30여만명으로 출정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ㄴ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했다.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고 수군 9000명은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다. 육군이 북상하면 해군이 남해와 서해를 돌며 지원하는 수륙병진작전이었다.

 

부산함락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가 패아여 전사하고 적은 동래부를 침공, 부사 송상현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충주함락

이일의 상주 저지선이 뚤리자 탈출한 이일은 신립과 고니시의 부대를 맞아 8000여 군사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전군 함몰당했다. 신립은 달천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관군패배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도중 용인 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과 조우중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희망은 없어지는 듯 했다.

 

선조의 탈출

왜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하자 평양으로 이어논의가 나왔고 대간종실들은 사직을 버리지 말것을 애원했다.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선조가 둘째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뒤 서행 채비를 갖추자 이들은 앞장서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노비문서를 맡고 있던 장예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때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의 세궁궐도 모두 불타없어졌다.

 

수군의 활약

이순신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데 이어 2차출동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가세,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따. 사천해전부터 거북선이 사용되어 그효능이 증명되었으며 일본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한산도에서 학인진을 응용하여 개전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국을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조명군의 반격

명나라 국경수비군이 패배한뒤 이여송을 다시 동정제독으로 삼아 2차원병을 보냈다. 이여송의 4만3000여 군사와 순변사 이일 별장 김응서의 관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여송은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했으나 서울인근의 벽제관에서 대패하였다. 행주산성의 권율은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명군은 퇴각하였고 적은 병력임에도 혈전을 벌여 왜군을 물리쳤다.

 

휴전 회담

명은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참전, 보급곤란으로 강원과 충청의 병력을 남하시켰다. 화의도중 보복적인 공격으로 진주성을 공격했지만 수만의 희생으로 지켜내었다.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4년 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고 감무역증인인 감합인을 복구, 조선8도중 4도의 할양, 조선왕자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질리가 없었다.

 

정유재란

195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명령을 내린다. 통재사원균의 미숙한전술로 패사하고 이억기 최호 조방장 배홍립 등이 전사하여 이순신이 공들였떤 한산도의 수비가 무너져 버렸다. 원군이 패사한뒤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명량에서 대파하고 서진을 봉쇄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고 회군명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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