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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중세사

<고려시대>태조왕건과 고려시대 개관

태조 왕건의 4대 정책


민족융합정책 - 호족세력 편제 정책, 정략결혼, 사성정책, 의제가족정책, 기인제도, 사심관제도

북진정책- 청천강-영흥만, 서경 중시

숭불정책- 팔관회 연등회 장려 불교장려

애민정책-요역 부역의 완화 조세형평, 취민유도 1/10세


태조 왕건의 중요 정책



학보


고려시대에 교육을 장려하기 위한 국가가 설치한 육영재단. 930년(태조 13)태조가 서학박사 정악이 주관하는 서경의 학교에 장학기금으로 미곡 100섬을 내린것에서 비롯, 이를 대여하여 얻어진 이자로써 학교를 운영하게 하였다.


역분전


후삼국 통일 후 인품 공로 충성도를 기중으로 지급한 토지제도로서 개국공신과 중앙관리의 경제기반을 제공하고 토지를 매개로 고려의 위계체제 안에 편성되도록 유도 하였다.


사심관 제도


왕권의 유지를 위한 호족세력의 회유책,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한 것이 시초


중앙의 고관을 출신지의 삼심관으로 임명하고 중앙에 거주하면서 그 지방의 부호장 이하의 관리 임명권을 지니도록 하였다. 향리감독, 풍속교정, 부역조달의 임무뿐만 아니라 그지방의 치안과 행정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지시. 충숙왕때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유향소와 경재소로 분화되었다.


기인제도


지방호족에게 호창 부호창이라는 관직을 주어 지방자치의 책임을 맡게 하는 동시에 지방 호족과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뽑아 중앙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왕권강화에 기여


결혼정책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해 관계를 더 깊이 다짐. 재위기간동안 부인 29명과 자녀 25남 9녀를 두어 실제로 국왕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성과가 있었다.


북진정책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함으로써 한반도의 영역은 신라시대의 대동강선에서 청천강선으로 확대되었다. (왕식렴 유금필을 보내어 여진족을 축출)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고자 서경을 북진의 전진기지로 중요시하였다.


흑창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주고 추수후에 갚게 했던 빈민구제기구. 986년 성종5년에 의창으로 바뀜


숭불정책


연등회 팔관회등 불교행사를 성대히 시행

승록사 설치, 승적 관리

법왕사 왕수사 흥국사 개태사 등 사찰 건립

도선의 비보설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사찰을 편제

민심을 수습하여 왕실의 안전을 도모


민족융합정책


정략결혼 사성 정책

호족세력을 회유하여 융합하는 한편 민심수습을 위한 수취체제를 개선, 지방세력을 흡수 통합하기위해 지방호족들에게 사신 파견


만부교 사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고려와 교류하기 위해 사신과 함꼐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지만 왕건은 거란의 신하를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다리에 묶어 굶어 죽도록 함


교육제도와 훈요 10조


개경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는 등 교육제도를 개선하였으며 후손에 대한 유훈으로 훈요십조를 반포


개태사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의 절. 개태사 뒤펴능로 천호산이 병충처럼 펼쳐져 있다. 이절은 불교 법상종에 속한다. 936년 태조 19년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


친신라 정책


종래의 골품제를 극복하면서 정통은 신라를 계승하여 신라적인 권위의 탈을 쓰고자 함. 후백제인을 냉대하고 신라 왕실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신라 귀족을 위하여 고려 관료 중에는 신라계 인물이 다수 포함되었다.


고구려 계승


고구려의 후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국통은 고구려를 따랐다. 발해유민을 흡수 하였고고구려 계승이념을 표방하였다.


외교관계


새로운 사회 건설의 방향을 제시, 중국의 5대 여러나라와 외교관계 수립


애민 정책


취민요도 표방, 수세율을 1/10로 경감, 물자징발 강제동원 전쟁을 회피

호족세력과 공신들의 횡포를 금지하는 조서 반포

억울하게 노비가 된자를 해방시킴

흑창 설치 - 빈민 구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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