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현대사

1946년 이후의 정치상황

관리자님 2017. 5. 19. 00:00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국민들의 실망과 우려과 높아졌다. 또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이 더해지자 분단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중도세력들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했다. 미군정은 김구와 이승만의 극우 세력을 배제하고 김규식 여운형등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길 바랬다. 이에 미군정은 좌우 합작운동을 지원하게 된다.


당시 좌익과 우익 모두 좌우 합작으로 분단을 피하고 통일을 해야 하는데에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토지 문제와 친일파 처리 문제에 의견이 엇갈렸다.


좌익은 5원칙을 우익은 8원칙을 제시하였다.


좌익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민주주의적 노동 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ㅇ위한 미주주의 기본 과업완수를 주장하며 3상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 미소 공동위원회의 속개운동을 전개하며 남북 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친일파 민족 반역자 를  정치에서 완전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여 검거후 투옥된 민주 애국 지사를 즉시 석방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익은 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 법령을 균등 사회건설 목표에 두고 국민 대표 회의에서 의정할 것을 주장했다.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 이 정부가 미소 공동위원회와 자주 독립 정신해 기해 해결할 것을 천명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 하되 임시 정부 수립후 특별법 제정후 처리 할것으로 구상하였다.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이후 김구는 적극 찬성하고 이승만은 조건부로 찬성하였으나 참여하지는 않았다. 단독정부 노선을 취하던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과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리를 즉각 해결하려는 좌익은 이에 반대하였다.


미군정은 좌우 합작을 추진하면서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을 창설하겠다고 공포하였다. 선거에 의한 민선의원과 미군정이 임명한 관선의원을 선출, 남조선 과도 정부를 수립하였다.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 문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이를 결렬시키고 말았다. 여운형이 암살 되면서 좌우 합작 위원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결국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따른 한국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되고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 소련은 이에 반대하지만 유엔 총회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의 불참이 있었지만 유엔 총회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정부 수립을 결정하였고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프랑스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유엔 총회에도 불참했던 소련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고 유엔 결의안의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유엔 소총회에서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의 우선 선거를 결의하였다. 이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크게 환영하였다. 하지만 김구 등의 한국 독립당은 남북 형상에 의한 총선거를 주장하였고 좌익은 반대 투쟁을 전개한다.


김구는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되자 통일 정부의 수립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