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만주의 무장 독립전쟁 <한국사 근현대사 정리>
만주사변
일제가 1931.9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2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 독립군에게는 더욱 큰 시련의 시기가 닥쳐왔다. 이때 반일 감정이 높아진 만주 지역 중국인들이 일제와 만주국 주도층 모두를 물리치겠다는 '반일 항일 운동'을 크게 일으키고,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3부 통합운동
1920년대 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4부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이 결과로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조직되었으며 혁신 의회 계열이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민부 계열이 조선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북만주의 무장 독립 전쟁
혁신의회 계열의 인사들이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한국 독립군을 만든다. 이청천이 총사령관이되어 중국 호로군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여 쌍성보 사도하자 대전자령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일본이 친일 한국인들을 이용하여 한중관계를 악화시키려 민생단 사건을 일으키고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된다. 이에 만주에서의 활동은 점차 어려워지고 지청천은 직할 부대를 편성하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독립군을 이동시킨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다.
남만주의 무장 독립전쟁
조선혁명군은 남만주 일대의 군정부인 국민부를 지지육성 하기위해 조선 혁명당의 군을 조직한다. 조선혁명군은 한중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일 전투를 벌이면서 국내 진공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향세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홍경성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한다.
한편 만주지역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로 창설된 동북 인민혁명군과 동북 항일 연군에 소속되어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37년 국내 조직의 지원아래 보천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이런 한인 항일 유격대는 일본의 관동군과 만주국 군대의 소탕작전에 밀려 소련으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일원으로 항일 활동을 벌인다.